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관동 대지진 (문단 편집) == 영향 == 국가적 차원의 재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주었기 때문에 이후 일본이 근대에서 현대로 변화하는 데 긍정적 영향을 준 측면도 있다. 이재민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멀리 떨어진 [[간사이]] 지역에 피난민들이 자리잡으면서 오사카의 인구가 폭증해 잠시 일본 최다 인구의 도시가 되는 일도 있었으며 자연스럽게 [[간토]]와 간사이 지방의 인적 교류가 많아지면서 요리 문화나 대중문화 등 문화적 교류가 증가했다. 내진, 내연에 관심을 갖게 되어 건축 분야에서도 발전이 있었다. [[간토 평야]]라는 넓은 평지 위에 도시가 위치했기 때문에 당시부터 도시권이 무분별하게 확장되는 중이었는데 지진과 그에 동반한 대화재로 큰 피해를 입은 게 계기가 되어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도시정비 및 도시계획이 자리잡았다.[* 허나 성과는 미미하여 2차 대전의 공습 당시도 대화재로 큰 피해가 있었고 이후에도 각종 재난 대책이 미비한 주택이 허다하다.] 스미다 강 위를 지나는 여러 교각들이 내진 설계에 기반하여 지어진 것도 이 시점부터이며 일본 최초의 [[아파트]]도 세워졌다.[* 당시 일본에서는 공동주택 전반을 아파트라고 불렀다.] 1924년 5월 [[일본제국 내무성|내무성]]에 의해 현재 도시정비 사업을 담당하는 [[UR]]의 전신격인 '도준카이'(同潤会) 재단이 설립되었으며 이 재단의 주도로 1933년까지 도쿄와 요코하마 곳곳에 이재민들을 위한 아파트가 건립되었다. 워낙 튼튼하게 지었기 때문에 몇몇 아파트들은 2000년대 초까지 남아 있었는데 가장 유명한 건물이 오모테산도에 있는 '아오야마 아파트'였다. 2003년 [[안도 다다오]]가 설계한 '오모테산도 힐즈'란 상가 건물로 재건축되었으나 딱 한 동이 그대로 보존되어 카페건물로 쓰인다. 반면 부정적인 방향으로는 경제적 피해 규모가 당시 국민총생산(GDP)의 약 37%에 달했고 일본인들이 자국이 안전한 땅이 아니라는 인식을 확실히 숙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때문에 경제 불안을 야기하게 되었다.[* 사실은 [[다이쇼 데모크라시]] 말년의 [[공황]] 분위기가 미증유의 국난으로 촉발되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. 고메이, 메이지 시절에도 지진은 있었지만 1923년 지진은 근대화가 급속도로 진행된 도쿄에서 큰 규모의 여진과 화재로 인한 건물 피해가 워낙 컸기 때문에 일본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.] 이듬해 금 수출이 금지되고 일본 군부의 폭주에 힘을 실어준 일련의 불황이 시작되는 등 사실상 일본 패망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도 할 수 있다. 본래 [[히로히토]] 황태자([[쇼와 덴노]])는 1923년에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으나 대지진의 참상을 본 그는 결혼식을 미루었다. 히로히토 황태자의 약혼녀 [[고준 황후|구니노미야 나가코]] 태자비는 대지진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위로하는 [[와카]]를 지었으며 [[데이메이 황후|사다코 황후]]도 이재민들을 위로하는 활동을 펼쳤다. 1925년에 건축물법 시행규칙의 구조물 강도 규정이 개정됐고 이에 맞춰 지진 관련 규정이 [[세계 최초]]로 제정됐다. 도쿄대학에는 지진연구소가 설립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. '방재의 날'도 관동대지진이 발생한 9월 1일에 맞춰 정해져 있다. 이날을 낀 8월 30일부터 9월 5일은 방재 주간으로 중앙정부를 비롯해 곳곳에서 방재훈련과 행사 등을 치른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